여러분은 ‘자신’을 얼마나 믿고 있나요? 모든 일에 있어 믿음을 갖고 나아간다는 건 엄청난 용기가 필요한 일인데요. HL이 여러분께 용기를 불어넣기 위해 믿음을 갖고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이들을 만나보았습니다.
남희두 선수를 이어 만나본 두번째 주자는 영화 <데드풀>의 초월번역으로 이름을 알린 번역가 황석희입니다. 19년차 베테랑 번역가로 최근에는 뮤지컬, 연극 대본 번역까지 영역을 넓히면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그를 만나 프리랜서 번역가의 삶에 대해 들어보았는데요. “음악으로 먹고 살 줄 알았는데 번역가가 되었다”고 이야기를 시작한 번역가 황석희의 , 시작합니다.
번역,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이라 시작했죠.
“어떻게 번역가가 되셨나요?”라는 질문에 돌아온 답은 ‘호구지책’이라는 지극히 현실적인 말이었습니다. 먹고 살기는 해야 하니까 가장 잘 하는 일을 했다며 대수롭지 않은 듯 말했지만, 그가 아무렇게나 진로를 정한 것은 아니었습니다.
Q. 어떻게 번역가 일을 하기로 결심했나요?
황석희: 제가 가장 좋아하는 일은 음악이에요. 밴드를 오래 했고, 당연히 ‘나는 음악으로 먹고 살 거야’라는 생각을 했어요. 그런데 현실이 그렇지 않더라고요. 호구지책은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고, 제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은 번역이었어요. 저는 되게 실용적인 사람이거든요. 자기 스스로가 뭘 제일 잘 하는 지 알고 있잖아요? 가장 좋아하는 일은 음악이지만 번역보다 잘 할 수 있는 일은 없다고 생각했어요.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내가 쌓은 경험과 기술을 믿었던 거죠.
실제로 그의 랩탑에는 최근 재결합을 발표한 오아시스의 스티커가 붙어있었는데요. 평소 SNS를 통해서도 음악에 대한 애정을 아끼지 않고 표현할 만큼 음악을 사랑하는 그이지만, 현실의 벽 앞에서 가장 잘 할 수 있는 것을 믿고 선택했습니다.
그렇게 번역 일을 시작하게 된 그에게 따라붙었던 건 ‘먹고 살 수 있겠니’라는 의심의 시선이었습니다. 사범대학교를 나온 만큼 임용고시를 보고 선생님이 되는 안정적인 진로도 있는데, 프리랜서가 되겠다는 건 주변인들에게는 일종의 백수 선언과 마찬가지였다고 합니다.
황석희: 제가 극장에 데뷔하기 전, 그러니까 경력이 아주 적었을 땐 업계 환경도 열악했어요. 40분에서 50분짜리 다큐멘터리나 드라마를 하루에 한 편씩 번역했고, 영화는 1.5일에서 이틀에 한 편을 번역해야 생계를 유지할 수 있었어요. 말도 안 되는 일정이지만 이걸 해 내야 입에 풀칠을 할 수 있었던 게 당시의 번역 시장이었어요.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작품을 마치고 내 이력서에 한 줄을 추가하는 것, 그게 좋았던 것 같아요. 일주일이면 4~5줄이 늘어나는데, 이력이 길어질수록 기분이 너무 좋은 거예요. 주변에서 이걸로 못 먹고 산다며 뜯어 말리는 걸 듣다 보면 자괴감도 들고 자꾸 나를 의심하게 되거든요. 그럴 때면 제 이력서를 열어봤어요. 지금까지 몇 편을 작업했고, 또 여기에 추가할 게 뭐가 있는지를 보면 이게 저의 방패막이 되어 주었죠. 제가 저를 의심할 때 제가 쌓아온 것(이력)들이 저를 지탱해 준 거예요. 저는 이게 되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. 막연한 근거 없는 믿음이 아니라, 사소하더라도 근거 있는 믿음이요.
원칙을 부수고 방향을 바꾸다
차근차근 경력을 쌓아 온 그에게 터닝포인트가 된 건 <데드풀>이었습니다. <데드풀>이 가진 B급 감성과 언어유희를 고스란히 살린 번역으로 호평을 받으며 크게 주목받았는데요. <데드풀>이 자신을 알린 효자 작품이면서도 손에 꼽게 힘들었던 작업이라고 소회를 밝혔습니다.
황석희: <데드풀>은 제가 가지고 있는 번역관과 원칙, 기술을 모두 무시하고 진행했던 작품이에요. 미국 문화색도 짙고, 마블에 대한 깊은 이해도 필요했어요. 그래서 다른 영화에서는 절대로 쓰지 않을 기술과 말을 그냥 다 썼어요. 날 것 그대로 번역을 한 거죠. 거의 벌거벗고 전쟁터에 나서는 기분이었어요. 혹시 상영관에 나오는 상업영화 자막에 욕설이 날 것 그대로 나오기 시작한 게 언제인 줄 아세요? <데드풀>이에요. 그 전에는 ‘X발’, ‘X나’ 이런 단어가 자막에 쓰인다는 건 상상할 수 없었어요. 돈을 주고 번역을 맡겼는데 날것의 욕이 쓰이는 건 상스럽고 천박하다고 여겨지는 풍조가 있었죠. 그래서 늘 ‘젠장’, ‘제길’, ‘빌어먹을’과 같은 단어만 돌려써야 했는데 <데드풀>에서 그걸 깨 버렸죠.
굳건하다고 여겨지는 벽을 깨는 용기는 어디서 나왔을까요? 그는 그저 직관을 따른 것이라며 수줍게 웃었습니다.
황석희: 벽을 파해야 할 땐 용기를 갖는다기보단 ‘그게 맞다’는 직관적인 생각을 따르는 것 같아요. 경력이 점점 쌓이면서 ‘이거 안전하게 번역해도 나한테 뭐라고 할 사람 없는데’라는 얄팍하고 보수적인 생각이 들 때가 있어요. 그리고 이 작업물에 대한 반응이 어떻게 나오겠다는 것도 얼추 감으로 알 수 있고요. 그래서 제 직관을 믿고 따르는 것 같아요. 분명히 호불호가 갈릴 것이고, 욕할 사람이 있다는 걸 아는데도 그렇게 하는 게 맞다는 생각이 들 땐 클라이언트를 적극적으로 설득합니다. 아무도 욕하지 않는 대신 아무도 안 좋아할 번역이 있고, 6은 좋아하고 4는 싫어할 번역이 있다. 근데 나는 후자가 맞는 것 같다고요.
드라마 <파친코>역시 그에게 잊을 수 없는 기억인데요. 미국인 작가가 쓴 대본을 한국어로 바꿔서 전달해야 하는, 그동안의 업무와 반대 방향의 작업이었기 때문입니다.
황석희: <파친코>를 작업할 땐 정말 힘들었어요. 영어 원문을 한국어로, 심지어 사투리를 쓰는 일제강점기의 이야기로 바꿔야 했거든요. 총괄 프로듀서(쇼러너)인 수 휴를 설득하는 작업이 많이 힘들었어요. 한국계이지만 문화가 달라서 그를 납득시키는 일이 쉽지 않았습니다. 예를 들면 “죽어도 싫어예”라는 말이 영어로는 “Even if I died”가 되니까 이게 그들 입장에서는 어린아이가 하는 말이라고 생각하기 어렵거든요.
텍스트 번역에 문화적 차이를 설명하는 일이 쉽지 않았지만 ‘한국인이 보기에 더 생생한 대본을 만들어야 한다’는 생각으로 끈질긴 설득 작업을 이어갔다고 하는데요. 한국어로 옮길 수 없는 문장이 있을 땐 작가가 새로 대본을 써 주는 일도 있었습니다.
황석희: 양진이 시집 가는 선자를 위해 밥을 차려주려고 쌀을 사려는 장면이 있어요 원문은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거기에 ‘Sorrow’라는 단어가 있었어요. 근데 sorrow는 sadness랑 뉘앙스가 다르거든요. 한국어로 표현하면 ‘서러움’에 가깝죠. 그 문장을 아무리 옮겨도 잘 안 되는 거예요. 그래서 “내 생각에 이 장면이 너무 중요한데, 이대로는 예쁜 대사가 나올 수 없다. 한국어로 나오지가 않는다”고 했더니 작가님이 대사를 다시 써 주셨어요. 설마 대사를 다시 써 주실줄은 몰랐는데 정말 놀랐고 감사했죠. 작가님이 몇 가지 옵션으로 써서 주신 걸 다시 번역하고 번역해서 결국 ‘선자 어매도 무믄서 설움 쪼매 삼키래이’가 됐어요. 원래는 ‘swallow sorrow’, 그러니까 ‘슬픔을 참아라’ 정도로 표현되지 한국어로 말하는 ‘설움을 삼키다’같은 뉘앙스가 아니거든요. 원문이랑 번역이 뉘앙스나 뜻의 차이가 꽤 있음에도 그대로 반영됐고, 다행히 그 장면에 대한 반응이 좋았어요.
관객과 가장 가까운 번역가
번역은 서로 다른 두 언어를 오간다는 점에서 오역의 가능성을 항상 안고 있는데요. 문화의 차이나 표현에 대한 잘못된 이해가 원문의 의도를 왜곡하게 되고, 오해를 만들 수 있다는 점에서 오역은 번역가에게 두려운 존재입니다. 황 번역가 역시 늘 오역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일을 하고 있는데요.
황석희: 좋은 번역가는 연출자의 의도를 최대한 파악해서 관객에게 온전히 전달할 수 있는 번역가예요. 그래서 많은 글을 읽고 이해하고 내 문장으로 풀어내는 자질이 필요하고요. 저도 많이 고민하고 연습하지만 오역은 피할 수 없는 존재예요. 그래서 매 작품마다 불안감에 시달려요. <데드풀2>를 번역할 때 다른 작품에서 오역 이슈가 크게 터진 적 있어요. 제가 작업한 작품이 아님에도 번역가가 수많은 사람들에게 맹공을 받는 것을 보니 두렵더라고요. 앞서 가는 사람이 지뢰를 밟은 걸 목격한 기분이었어요. 그 상태에서 아내와 장을 보러 나갔다가 붐비는 사람들을 보고 인도 한가운데에서 멈춰 서 버렸어요. 공황이 왔던 거죠. 한동안 등을 벽에 붙이지 않으면 견딜 수 없었어요.
본인의 작품이 아님에도 공황을 겪을 만큼 부담스러운 오역. 황 번역가는 오역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할 순 없지만 담담한 척, 태연한 척 받아들이는 법을 익혔습니다.
황석희: 오역은 우길수록 초라해져요. 오역을 했을 땐 빠르게 인정하고, 반성해서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면 돼요. 다음 작품에는 더 나은 번역을 보여줄 수 있도록 노력하는 거예요. 번역가가 인정하고 반성하는 자세를 보여야 관객들도 ‘휴먼 에러(Human error)’의 가능성을 받아들여 준다고 생각해요. 번역가는 반성하고 피드백을 수용하고, 관객들은 휴먼 에러의 가능성을 남겨두면서 서로 소통하면 다음번에 더 좋은 결과물을 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.
관객과 번역가가 건설적인 피드백을 주고받을 때 더 나은 번역이 나올 수 있다고 말하는 그는 실제로도 관객들에게 먼저 다가가는 편인데요. 인스타그램 등을 통해 많은 이들과 적극적으로 소통하고 있습니다.
황석희: 저는 ‘관객과 가장 가까운 번역가’가 목표예요. 늘 최고의 번역가가 될 자신은 없지만 관객과 최고로 가까운 번역가가 될 자신은 있다고 말하죠. 지금도 관객과 가장 가까운 번역가는 저라고 자신해요. 옛날에는 제 실수에 대해 날카롭게 피드백을 날리던 분들도 제가 순순히 인정하고 노력하는 모습을 보면서 지금은 사뭇 다른 반응을 보여주세요. 이전에는 틀린 부분을 지적하면서 욕설이 섞인 메시지가 왔다면 지금은 ‘번역가님 어디에 오타 있어요~’라며 부드러운 메시지가 와요. 그렇다고 해서 제 실수까지 편안하진 않지만요(웃음).
이제 그는 관객과 가장 가까이에 있는 번역가이자 믿고 보는 번역가로 자리잡았습니다. 주변의 우려를 한 몸에 받던 프리랜서 번역가가 국내에서 손꼽히는 번역가로 자리잡기까지 걸린 19년의 시간, 그 시간 속에서 믿음은 그를 지탱해주었습니다.
Q. 황석희에게 믿음이란?
황석희: 번역가 황석희에게는 재산이자 경쟁력이요. 부끄럽지만 제가 정말 좋아하는 수식어가 ‘믿고 보는 번역가’예요. 규모가 작은 영화사나 제작사들은 제가 번역에 참여했다는 걸 가지고 프로모션을 많이 진행하세요. 저는 그 회사가 제 이름을 그렇게 써 주시고, 거기에 믿고 보는 번역가라는 수식어를 달아 주시는 게 쑥스럽지만 좋아요. 과찬이고 과분한 말이라는 건 알지만, 나를 그렇게 생각해주는 관객들이 있다는 건 내가 신뢰받고 있다는 의미잖아요. 그건 저에게 있어 경쟁력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.
‘신뢰가 재산’이라는 상인처럼 관객들의 믿음이 나의 재산이라는 황석희 번역가. 그는 관객들의 호응과 신뢰가 일을 할 수 있는 경쟁력을 넘어 나를 믿는 바탕이 된다고도 말합니다.
황석희: 때때로 제가 내 놓은 결과물에 대해 만족스럽지 못할 때가 있어요. 스스로는 ‘번역을 잘 한 게 맞을까?’라는 의심을 하고 있는데 관객들의 반응이 좋으면 그 의심을 씻을 수 있어요. 관객들의 반응이 좋은데도 제가 계속 의심하고 있으면 그건 그분들의 안목을 무시하는 게 되는데, 그래서는 안 되잖아요. 그래서 요즘엔 제 작업물을 좋아해 주시는 분들을 보면서 스스로에 대한 의심을 지우고 있어요. ‘너 저 사람들이 좋아할 만큼 열심히 했어’라고 스스로에게 자신감을 불어넣는거죠. 관객들이 주는 믿음이 제가 스스로를 믿게끔 만드는 원동력이에요.
Q. 마지막으로, 나를 믿고 나아가는 이들에게 응원의 한 마디 부탁드립니다.
황석희: 세상 모두가 나를 믿지 않아도 나만은 나를 믿고, 모두가 나를 냉대해도 나만은 나를 대접하고 귀하게 여겨야 한다고 생각해요. 스스로를 지칠 땐 토닥이고 일어날 땐 손을 한번 잡아주세요. 결국은 내 등을 떠밀어 주는 손도 나의 손, 나의 믿음입니다. 나를 믿고 뚜벅뚜벅 전진하세요.
자신의 능력을 필요로 하는 곳이라면 물리적인 시간이 허락하는 한 의뢰를 받는 순서대로 정확히 스케줄에 넣는다는 황석희 번역가. 10년 뒤에도 지금처럼 일하고 있으면 좋겠다고 담담하게 말하는 그의 모습에서 19년동안 자신을 증명해 온 이의 단단한 자기 확신을 엿볼 수 있었는데요. 팔에 새겨진 ‘세상을 번역하다’라는 말처럼 관객을 넘어 세상과 소통하고자 하는 황석희님의 내일을 HL이 응원하겠습니다!